영화 파수꾼, 언어를 갖지 못한 소년들의 관계와 파국

죽음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침묵이었다 

윤성현 감독의 데뷔작 <파수꾼>(2011)은 한 고등학생의 죽음에서 출발한다. 아들에게 무심했던 아버지가 뒤늦게 아들의 시간을 되짚기 시작하고, 사진 속에 남은 두 친구를 찾아가면서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형식은 미스터리에 가깝지만 이 영화가 추적하는 것은 사건의 범인이 아니다. 

영화 파수꾼


 주목해야 할 것은 아버지가 얻어내는 대답의 성질이다. 아무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설명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한 사람은 회피하고 한 사람은 사라졌다. 진실이 은폐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말로 정리된 적이 없었다는 편이 정확하다. 이 영화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사람은 왜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가장 말을 하지 못하는가. 

서열 외에는 관계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애정의 언어가 없을 때 남는 것

기태와 동윤과 희준의 관계는 언뜻 견고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오가는 말은 대부분 농담과 욕설과 힘겨루기다. 좋아한다거나 서운하다는 감정을 직접 발화하는 장면은 사실상 없다. 감정을 표현할 어휘가 주어지지 않은 집단에서 친밀함은 다른 형식을 빌려 표현될 수밖에 없고, 그 형식이 대개 위계다. 누가 더 위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만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 구조에서 장난과 폭력의 경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행동이 어느 날은 우정의 증거였다가 다음 날은 모욕이 되며, 어느 쪽인지 판정할 기준은 서열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쥔다. 남성 집단에서 오래 관찰되어 온 이 문법은 청소년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회식 자리의 짓궂은 농담이나 조직 안의 텃세 역시 애정과 지배를 구분하지 못하는 같은 언어의 성인 판본이다. 

잃을까 두려운 사람이 먼저 상처를 낸다 

기태는 관계를 잃는 데 대한 공포가 유난히 큰 인물로 그려진다. 아버지와 둘뿐인 집에서 그가 소속을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가 친구들이었다는 점을 영화는 반복해 암시한다. 문제는 그가 그 관계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으로 통제를 택한다는 데 있다.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큰 사람일수록 상대의 이탈 신호를 먼저 감지하고, 상처받기 전에 상대를 먼저 밀어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는 것은 애착 연구에서 반복해 지적되어 온 패턴이다. 기태의 공격성은 강함의 표현이 아니라 두려움의 표현이며,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결과를 그 자신이 앞당긴다. 관계를 붙들려는 힘이 관계를 부수는 힘과 같은 방향으로 작동하는 순간, 파국은 예정된 것이 된다. 

진실이 하나가 아닐 때 책임은 어디로 가는가? 

세 사람의 기억은 끝내 포개지지 않는다 

영화는 시점을 옮겨 가며 같은 시기를 여러 번 보여주지만, 조각들은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구도 결정적 가해자가 아니고, 그렇다고 누구도 무고하지 않다. 진실이 관점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는 사실 자체를 이야기의 뼈대로 삼는 이 방식은 책임을 흐리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 명의 악인을 지목하는 서사는 관객에게 안도감을 준다. 

나쁜 사람이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라면 나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파수꾼>은 그 출구를 닫아 버린다. 여기서 벌어진 일은 특별히 잔인한 누군가 때문이 아니라, 서로에게 말하지 않은 채 각자의 방식으로 물러선 결과다. 악의 없이도 사람은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가 끝까지 붙들고 있는 명제다. 

해명 없이 끝나는 관계들 

살면서 우리가 잃는 관계의 대다수는 결별의 순간조차 갖지 못한 채 끝난다. 연락이 뜸해지고, 오해가 굳고, 물어볼 시기를 놓치고, 그러다 물어보는 일 자체가 우스워진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생략하는 편이 언제나 더 쉽고 덜 아프기 때문이다. 그 생략이 쌓여 만든 결과가 이 영화의 첫 장면이다. 아버지의 뒤늦은 추적 역시 같은 문법 위에 놓여 있다. 

그는 아들이 살아 있는 동안 묻지 않았던 질문을 아들이 사라진 뒤에야 들고 다닌다. 이해는 대체로 이런 시차를 두고 도착한다.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묻는 일이 어색하고, 관계가 끝난 뒤에야 물어볼 용기가 생긴다. 그 시차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오해한 채 멀어지며, 남은 쪽은 뒤늦게 도착한 이해를 어디에도 쓰지 못한 채 들고 서 있게 된다. 

아무도 파수꾼이 되지 못했다 

제목은 무언가를 지키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이 이야기 안에서 누구도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지킬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키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다. 미안하다는 말, 서운했다는 말, 네가 필요하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그 문장을 연습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파수꾼>은 청소년기의 비극을 그린 영화가 아니다. 감정을 언어로 옮기는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기록이며, 그 훈련의 부재는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관계를 지키는 능력은 마음의 크기가 아니라 말할 줄 아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 영화가 십수 년째 회자되는 이유는 그 사실을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증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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